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로마는 공화정으로 이행한 직후 두 번의 군사적 위기를 겪고 내부갈등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군사적 위기를 잘 넘겼지만 내부 갈등을 해소하지는 못했습니다. 내부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특이하게도 로마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는 반드시 단결했고, 위기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내부적인 갈등요소가 있더라도 로마는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국을 건설할 지혜를 얻게 됩니다.
        두 번의 군사적 위기는 모두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촉발되고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 심화되었습니다. 첫 번째의 군사적 위기는 포르센나의 로마 공격으로 인해 촉발되었고, 두 번째의 군사적 위기는 켈트족의 로마 점령을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그리고 포르센나와 켈트족이 물러간 이후에는 항상 라틴동맹의 내부분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라틴동맹'의 주도권 싸움입니다. 즉, 내부분열의 원인은 로마에 반대하는 도시가 로마의 약화를 틈타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로마는 배신한 도시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백 년간 두 번이나 로마를 배신한 라틴동맹을 해체합니다. 그 대신에 새로운 동맹체제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연합'입니다. 새로운 동맹체제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했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통치체제는 이제 막 재정복된 라틴 동맹의 도시들이 갖고 있을 로마에 대한 증오감을 해소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새로운 통치체제는 로마의 힘에 상관없이 도시간의 견고한 결합을 보장해야 했습니다. 셋째로, 새로운 통치체제는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로마는 다음과 같은 정책을 폅니다. 우선 동맹에 속할 각 도시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조약을 체결합니다. 첫 번째 등급의 도시는 독립을 상실하고 로마에 편입됩니다. 대신에 그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고, 스스로를 위한 자치정부를 갖습니다. 두 번째 등급의 도시는 '무니키피아'라고 불리며, 투표권이 제외된 로마 시민권을 갖습니다. 이들은 로마 시민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지되, 관직에 선출되거나 관리를 선출할 권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도시들은 전쟁 발발 시 로마에 병력을 제공할 의무를 지녔습니다. 다만 병사들의 급여는 로마에서 지불하게 됩니다. 이 도시들 역시 자치권이 주어졌습니다. 세 번째 등급의 도시는 '소키'라고 불리며 로마와 군사적인 동맹만을 맺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요청이 있을 때 자체 비용으로 병력을 지원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러한 방식으로 도시의 특성에 따라 다른 조약을 맺었습니다. 다만 '로마연합'의 모든 도시는 독자적인 외교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외교적인 관계는 오로지 로마와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로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국 시민이나 동맹국 시민을 파견하여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이 도시들은 전략적 요충을 점거하는 동시에 각 도시의 동향을 파악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로마는 위의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도시들은 단지 외교권만을 상실하고 완전한 자치를 허용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낼 의무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신보다 군사력이 강한 로마를 통해 군사적인 안전을 도모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로마가 관용을 베풀었으므로, '로마연합'의 첫 번째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각 도시는 자체적인 외교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도시가 연대하여 로마에 반란을 일으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전략적 요충지들을 차지했으므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 동시에 정보를 빠르게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은 근절되었고, 로마는 새로운 동맹의 두 번째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마지막 목적인 병력의 확보도 실현되었습니다. 모든 조약에 직접적으로 병력제공 및 상호방위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로마는 '로마연합'을 통해 각 지방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외교감각은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원복씨의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책에 따르면, 나폴레옹도 '로마연합'과 같은 원리로 스위스의 내분을 해결하였다고 합니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우리나라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통합을 이루어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로마연합'체제에는 이런 장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인의 세력이 연합에 가입한 각 도시와 전국에 퍼져있는 식민지로 분산되는 단점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사시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가도'를 만들었습니다. '로마가도'덕분에 지역과 중앙의 연락이 쉬워졌으며, 유사시에 군대를 신속하게 모집하고 파견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인이야기>의 지적대로 로마인들은 정략적 목적으로 도로망을 만든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다만 신기한 것은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로마가도'를 역사가들이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로마사>와 <로마제국사>에는 로마가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로마문명사>에는 정치적인 목적에 대한 언급을 소홀히 합니다. 그들이 로마가도를 낮게 평가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로를 만드는데 들어간 인력과 물자와 자금과 노력을 생각할 때, 로마인들은 로마가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인들이 로마가도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로마사를 다룰 때에도 로마가도를 자세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로마인들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도로망 건설을 중시했으나,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와 같은 해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로마가도'를 자세하고 명확하게 다루었다는 것에서, 그리고 그것에 한정해서 <로마인 이야기>는 다른 책들보다 뛰어납니다.
        결국 로마는 동맹국들의 배신을 극복할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그 첫 번째는 '로마연합'이라는 뛰어난 외교정책이고 두 번째는 '로마연합'을 뒷받침하는 가도의 건설입니다. 이 두 요소를 통해 로마는 지방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인 통합을 이루는 어려운 과제의 해결책을 - 어쩌면 그들도 모르는 새에 - 제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을 이루어낸 그들도 자국 내의 계급투쟁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평민은 조금씩 자신들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려고 노력했고, 귀족들은 조금씩 후퇴하면서도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수백년간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극단적인 대립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로마인들은 전쟁만 터지면 신기하게도 단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로마에는 다행스럽게도 전쟁이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중간에 조금씩 휴지기가 있기는 했지만 삼니움전쟁, 피로스와의 전쟁, 북이탈리아 정복전쟁, 1, 2, 3차 포에니전쟁, 마케도니아 전쟁 등이 거의 2세기동안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는 평화가 찾아올 때 까지만 평화로웠습니다.
        이 전쟁들의 사이마다 로마는 내부 분쟁에 휘말렸습니다. 그 분쟁의 대다수는 정치적인 타협을 통해 그때그때 일시적인 해결을 보았고, 그 결과 로마 공화정의 통치체제 및 관직체계가 완성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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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로마는 공화정으로 이행한 직후 두 번의 군사적 위기를 겪고 내부갈등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군사적 위기를 잘 넘겼지만 내부 갈등을 해소하지는 못했습니다. 내부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특이하게도 로마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는 반드시 단결했고, 위기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내부적인 갈등요소가 있더라도 로마는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국을 건설할 지혜를 얻게 됩니다.
        두 번의 군사적 위기는 모두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촉발되고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 심화되었습니다. 첫 번째의 군사적 위기는 포르센나의 로마 공격으로 인해 촉발되었고, 두 번째의 군사적 위기는 켈트족의 로마 점령을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그리고 포르센나와 켈트족이 물러간 이후에는 항상 라틴동맹의 내부분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라틴동맹'의 주도권 싸움입니다. 즉, 내부분열의 원인은 로마에 반대하는 도시가 로마의 약화를 틈타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로마는 배신한 도시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백 년간 두 번이나 로마를 배신한 라틴동맹을 해체합니다. 그 대신에 새로운 동맹체제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연합'입니다. 새로운 동맹체제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했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통치체제는 이제 막 재정복된 라틴 동맹의 도시들이 갖고 있을 로마에 대한 증오감을 해소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새로운 통치체제는 로마의 힘에 상관없이 도시간의 견고한 결합을 보장해야 했습니다. 셋째로, 새로운 통치체제는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로마는 다음과 같은 정책을 폅니다. 우선 동맹에 속할 각 도시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조약을 체결합니다. 첫 번째 등급의 도시는 독립을 상실하고 로마에 편입됩니다. 대신에 그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고, 스스로를 위한 자치정부를 갖습니다. 두 번째 등급의 도시는 '무니키피아'라고 불리며, 투표권이 제외된 로마 시민권을 갖습니다. 이들은 로마 시민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지되, 관직에 선출되거나 관리를 선출할 권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도시들은 전쟁 발발 시 로마에 병력을 제공할 의무를 지녔습니다. 다만 병사들의 급여는 로마에서 지불하게 됩니다. 이 도시들 역시 자치권이 주어졌습니다. 세 번째 등급의 도시는 '소키'라고 불리며 로마와 군사적인 동맹만을 맺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요청이 있을 때 자체 비용으로 병력을 지원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러한 방식으로 도시의 특성에 따라 다른 조약을 맺었습니다. 다만 '로마연합'의 모든 도시는 독자적인 외교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외교적인 관계는 오로지 로마와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로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국 시민이나 동맹국 시민을 파견하여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이 도시들은 전략적 요충을 점거하는 동시에 각 도시의 동향을 파악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로마는 위의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도시들은 단지 외교권만을 상실하고 완전한 자치를 허용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낼 의무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신보다 군사력이 강한 로마를 통해 군사적인 안전을 도모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로마가 관용을 베풀었으므로, '로마연합'의 첫 번째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각 도시는 자체적인 외교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도시가 연대하여 로마에 반란을 일으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전략적 요충지들을 차지했으므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 동시에 정보를 빠르게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은 근절되었고, 로마는 새로운 동맹의 두 번째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마지막 목적인 병력의 확보도 실현되었습니다. 모든 조약에 직접적으로 병력제공 및 상호방위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로마는 '로마연합'을 통해 각 지방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외교감각은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원복씨의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책에 따르면, 나폴레옹도 '로마연합'과 같은 원리로 스위스의 내분을 해결하였다고 합니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우리나라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통합을 이루어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로마연합'체제에는 이런 장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인의 세력이 연합에 가입한 각 도시와 전국에 퍼져있는 식민지로 분산되는 단점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사시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가도'를 만들었습니다. '로마가도'덕분에 지역과 중앙의 연락이 쉬워졌으며, 유사시에 군대를 신속하게 모집하고 파견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인이야기>의 지적대로 로마인들은 정략적 목적으로 도로망을 만든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다만 신기한 것은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로마가도'를 역사가들이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로마사>와 <로마제국사>에는 로마가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로마문명사>에는 정치적인 목적에 대한 언급을 소홀히 합니다. 그들이 로마가도를 낮게 평가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로를 만드는데 들어간 인력과 물자와 자금과 노력을 생각할 때, 로마인들은 로마가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인들이 로마가도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로마사를 다룰 때에도 로마가도를 자세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로마인들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도로망 건설을 중시했으나,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와 같은 해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로마가도'를 자세하고 명확하게 다루었다는 것에서, 그리고 그것에 한정해서 <로마인 이야기>는 다른 책들보다 뛰어납니다.
        결국 로마는 동맹국들의 배신을 극복할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그 첫 번째는 '로마연합'이라는 뛰어난 외교정책이고 두 번째는 '로마연합'을 뒷받침하는 가도의 건설입니다. 이 두 요소를 통해 로마는 지방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인 통합을 이루는 어려운 과제의 해결책을 - 어쩌면 그들도 모르는 새에 - 제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을 이루어낸 그들도 자국 내의 계급투쟁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평민은 조금씩 자신들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려고 노력했고, 귀족들은 조금씩 후퇴하면서도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수백년간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극단적인 대립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로마인들은 전쟁만 터지면 신기하게도 단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로마에는 다행스럽게도 전쟁이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중간에 조금씩 휴지기가 있기는 했지만 삼니움전쟁, 피로스와의 전쟁, 북이탈리아 정복전쟁, 1, 2, 3차 포에니전쟁, 마케도니아 전쟁 등이 거의 2세기동안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는 평화가 찾아올 때 까지만 평화로웠습니다.
        이 전쟁들의 사이마다 로마는 내부 분쟁에 휘말렸습니다. 그 분쟁의 대다수는 정치적인 타협을 통해 그때그때 일시적인 해결을 보았고, 그 결과 로마 공화정의 통치체제 및 관직체계가 완성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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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을 로마에서 영원히 쫓아낸 후 로마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당한 위기의 원인은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왕의 -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 복귀를 꾀하는 세력과 국가들로 인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변 민족들과의 전쟁이며, 세 번째는 정치체제의 변화로 인한 귀족과 평민간의 대립입니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와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왕위에서 쫓겨난 그는 한 에트루리아 도시의 왕인 '포르센나'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합니다. 포르센나는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말을 듣자 직접 로마를 공격합니다. 이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왼손잡이 무티우스 이야기', '홀로 다리를 막은 호라티우스 이야기'등의 전설이 전해져 오며, <로마인이야기>에서는 이 전쟁을 '로마는 포위를 견디다가 에트루리아 영토를 내어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라는 정도로 서술합니다. 그러나 '로마가 포르센나한테 케발렸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 합니다. 루키우스이야기나 호라티우스 이야기는 모두 신빙성이 거의 없습니다. <로마사>와 <로마제국사>는 이 전설들을 패전을 윤색하기 위한 로마의 전쟁광고로 묘사합니다. <로마제국사>에서는 '로마는 정복한 에트루리아영토를 반납했고, 연이은 라틴인의 공격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당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데 거의 한 세기가 소모되었다.'라고 이야기하며, <로마사>에서는 '포르센나가 로마를 함락한 듯 하다.'라고 서술합니다.
        포르센나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로마의 정치체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 합니다. 그 결과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는 왕위를 되찾는데 실패하고, 로마는 공화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전쟁에 연이어 라틴동맹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로마는 이 내전으로 인해 또다시 많은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 시기에 입은 손실을 회복하는 데에는 백여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후 로마는 다시 예전의 세력을 회복했습니다. 다시 강해진 그들은 에트루리아의 주요도시인 '베이'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켈트족이 로마로 쳐들어오게 됩니다. 켈트족은 일곱 달 동안 로마를 점령하고 300~500 킬로그램의 금을 받은 후 떠나갔습니다. 로마는 이 때 매우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게다가 켈트족이 떠난 이후 여러 가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반란에 관한 기록들이 조금 불분명합니다. <로마사>의 서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갓 점령한 에트루리아 지방과 몇몇 라틴도시들이 먼저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반란이 진압되고 난 이후 삼니움족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에서 로마는 어느 소도시를 삼니움족에게 내어주고 대신 대도시 카푸아를 자기 세력권에 편입합니다. 여기에 배신감을 느낀 라틴동맹의 다른 도시들이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로마인이야기>에서는 이러한 구분 없이 전쟁이 연속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기에 난데없이 그리스 역사를 삽입한 후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 버립니다. <로마제국사>는 전쟁에 대한 구분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계속 전쟁중이었던 것으로 묘사합니다. <로마문명사>에서는 <로마사>와 유사하게 두 전쟁의 시기를 구분합니다. 이처럼 상반된 관점이 있으므로 이 시기의 전쟁을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의 세 가지는 확실합니다. 로마는 켈트족의 침입 이후 거의 한 세기동안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는 '카밀루스'라는 위대한 장군을 통해 극복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전쟁이 끝난 후 로마는 '라틴동맹'을 해체하고 새로운 체체를 출범시킵니다.
        로마의 국내 정치상황도 매우 불안했습니다. 일단 왕을 없애기는 했지만, 그 다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사>에서는 세 가지 설을 제시합니다. 초보적인 집정관-법무관 체제, 독재관 체제, 3인의 법무관 체제가 그것입니다. 이 중 초보적인 집정관-법무관 체제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치제제가 딱히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칸슐러 트리뷴'이라는 3-9명으로 이루어진 관직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로마인이야기>에서 언급한 6인의 전략담당관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당시 로마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기록이 불명확하고 여러 가지 제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불명확성에 근거하여 추측할 때, 아마도 이 당시 로마는 여러 가지 정치체제를 실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1)
        다만 이 모든 불명확한 주장들에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원로원의 권한 강화가 그것입니다. 모든 실험들은 왕을 대신할 관직을 만드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관직을 받을 인재를 고르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당시 유능한 인재는 모두 원로원에 소속된 귀족이었습니다. 왕을 대신할 관직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귀족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왕의 권한이 원로원에 포섭되었고, 원로원은 조언기관의 역할에서 조금씩 벗어나 실제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원로원은 국가의 비상시에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로마인이야기>에서 인용한 폴리비오스의 지적은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정치체제가 왕정, 귀족정, 민주정을 혼합한 정치체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민회와 집정관, 심지어 그들의 권한이 미칠 수 없는 평민회의까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감안할 때 이 시기 로마의 정치체제는 귀족정이었다고 보는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집정관은 1년을 임기의 관직인데 반해, 원로원은 영구적인 국가기관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집정관은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면 다시 원로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집정관이 원로원의 '권고'를 거스르는 정책을 실행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원로원은 민회의 결의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권리를 상실하게 되자, 원로원은 민회에 안건을 상정할 권한을 독점적으로 지니게 됩니다. 이로서 원로원의 마음에 들지 않는 법안은 민회의 안건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원칙적으로 미치지 '않아야'하는 평민회의에는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평민회의의 의장은 '호민관'인데, 호민관은 1년 임기의 관직입니다. 원로원은 임기가 끝난 호민관에게 원로원 의석을 보장하여 호민관을 포섭합니다. 호민관은 모두 평민출신인데, 당시 평민출신으로 원로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귀족으로의 신분상승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민관이 원로원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쉽게 추진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호민관이 자신의 임기를 끝마치면 원로원에 들어가는 관례를 공식적인 것으로 묘사하지만, 다른 책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호민관이 공식적인 경력을 일컫는 '명예로운 경력'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정치적 관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계급의 성장으로 인해 귀족의 기득권은 조금씩 축소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갈등이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을 때 평민들은 군복무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파업했고,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평민들의 권리가 조금씩 늘어가도 귀족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덕분에 귀족과 평민은 전쟁이 끝날 때마다 분열했고, 이 분열은 카이사르의 등장 이전까지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했습니다.
        로마는 공화정으로 이행한 이후에 외적의 침입으로 두 번의 위기를 맞았고, 내부적인 분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켈트족의 침입은 좀 자연재해와 같았고, 포르센나의 침입은 로마의 정치적 혼란 및 분열상황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로마는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두 번의 위기를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극복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귀족과 평민간의 내부적인 갈등은 오래도록 로마의 고질적인 문제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먼 훗날에 이 대립은 로마가 내전을 벌이는 원인이 됩니다.


(1) : 허승일씨의 '로마 공화정 연구'라는 책(논문집)에서는 칸슐러 트리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두 가지의 학설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 학설은 칸슐러 드리뷴을 행정적 필요와 연결한 학설입니다. 당시 로마는 지나치게 많은 전쟁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군통수권은 오로지 2명의 집정관에게만 있습니다. 2명의 집정관으로는 3개 이상의 전쟁을 동시에 지휘하기 어려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정관은 전쟁에 모든 노력을 쏟느라 다른 업무를 보지 못할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칸슐러 트리분입니다. 칸슐러 트리분은 군 통수권을(임페리움) 가진 3~6명의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두 번째 학설은 칸슐러 트리뷴을 계급투쟁과 연관하여 설명합니다. 이 학설에 따르면 평민들이 콘술직을 개방해 달라고 귀족들에게 요청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이 요청을 받은 귀족들은 콘술직을 평민에게 개방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대신 군 통수권을 지닌 칸슐러 트리뷴 직을 만들어 평민에게 일부만 개방하기로 하여 정치적인 타협을 이루어 냅니다. 허승일씨는 이 중 '행정적 필요'에 의한 학설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허승일씨도 칸슐러 트리분직의 창설 시기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는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 자료가 정확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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