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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16 가상적 사물과 사실적 사물의 구분

군 인트라넷 게시판에 토론용으로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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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첫 번째와 세 번째 네모를 '빨간네모'라고 부르고, 두 번째 네모를 '파란네모'라고 부른다. 색채의 차이는 각각의 네모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만일 색에 차이가 없다면 세 네모는 모두 같다.

이 두 네모는 배경과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우스로 글을 드래그 했을 때 배경과 구분된 네모를 볼 수 있다. 우리는 배경과 차이나지 않는 네모를 배경과 구분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는 배경과 차이가 있는 네모를 구분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차이가 있는 사물을 구분할 수 있고 차이가 없는 사물을 구분할 수 없다.
색은 빨간 네모와 파란 네모의 유일한 차이점이다. 색맹인 사람은 이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차이는 구분의 기준이므로 색맹인 사람은 위의 세 네모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위의 두 하얀 네모의 색이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html코드나 포토샵의 관점에소 두 도형은 다른 색채코드를 지닌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색의 차이를 통해 빨간 네모와 파란 네모를 구별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색의 차이를 사물을 구분하는데 사용할 수 없다. 사물이 실제로 차이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으면 사물은 구별되지 않는다.
관 점은 차이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우리의 눈은 세 가지 색의 강약과 혼합을 통해 사물의 색을 결정한다. html 코드나 포토샵에서 색은 6자리의 16진수 숫자로 표현된다. 우리의 눈에서 하나의 섹은 세 가지 색의 혼합과 강약에 대응되며 컴퓨터에서 6자리의 16진수 숫자들은 각각 하나의 색에 대응된다. 이처럼 우리는 관점을 통해 색의 차이를 질서를 갖추어 배열한다.
차이는 구분의 기본 원리이며 관점은 차이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므로 구분이란 관점을 통해 차이의 유/무를 판단하는 행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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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니터는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일 수도 있고 3D 입체영상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수도 있다. 내 모니터가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 모니터는 사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내 모니터가 3D입체영상이 만들어낸 이미지라면 나의 모니터는 가상적으로 존재한다. 내 눈앞의 모니터는 가상적 사물일 수도 있고 사실적 사물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가상과 사실은 다른 사물에 의존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가상은 존재하지 않으나 우리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이미지*1의 속성'이며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의 속성'이다.
그 러나 위와 같은 개념적 관점의 구분은 내 눈앞의 모니터가 가상적 사물인지 실제적 사물인지 구분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가능한가?'라는 개념적 관점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나는 착각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혹은 '한 대상이 가상적 속성을 지니는지 사실적 속성을 지니는지 알 수 있는가?'*2와 같이 사물과 관련한 질문만이 필요할 뿐이다.
아마도 '가상과 사실의 구분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질문의 대답에 따라 '가상'과 '사실'이라는 단어들은 무의미해질 수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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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마을 사람들은 착하다.'라는 명제의 참/거짓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방안에 모니터가 있다.'라는 명제의 참/거짓은 쉽게 밝혀진다. 우리는 참/거짓이 분명할때 보다 참/거짓이 분명하지 않을 때 착각하기 쉽다. 우리는 착각을 하지 않았을 때 사실을 명확하게 보며 사실에 대비되는 가상 또한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가상과 사실의 특성은 참/거짓을 쉽게 밝힐 수 있는 사물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흔히 보는 모니터, 컵, 마우스, A4용지 등의 사물에 관한 사실여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사물을 이용한 가상적 상황을 쉽게 만들 수 있다. A4용지 위에 컵을 올려놓는 상상을 해 보자. 이것은 하나의 가상이다. 컵 속에 담겨있는 커피를 3D그래픽으로 표현한다면 보다 더 강력한 가상이 된다 그러나 지금 내 옆의 컵과 그 속의 커피는 실제로 존재한다. 우리는 사물의 이러한 특징을 이용하여 가상과 사실의 본모습을 명확히 드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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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는 어떤 사람에게만 옳고 다른 사람에게는 옳지 않은 사실을 떠올릴 수 없다.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옳은 것이다. 사실적 사물에 대한 서술 역시 모든 사람에게 옳다. 이러한 객관성은 사실의 주요한 특징이며 사실적 사물과 가상적 사물의 구분도 객관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를 통해 사물을 관찰할 뿐 사물에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없다. 나는 커피의 시각적, 촉각적, 미각적, 후각적 특징을 알고 이 특징들로 추론된 공간적, 시간적 특징들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감각기를 통하지 않고 커피에 대해 알 수 없다.*4
나의 감각기는 나에게만 정보를 줄 뿐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만 정보를 주는 감각기의 특징 때문에 감각정보의 객관성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여 감각정보의 객관성을 우회적으로 확인한다. 객관의 정의상 모든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주장은 객관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 러나 모든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주장을 객관의 기준으로 삼기는 어렵다. 단적으로 중세 유럽사람들은 모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나 신의 존재여부는 객관적이지 않다. 신의 존재가 중세에는 객관적이고 현대에는 객관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므로 여러 사람을 기준으로 객관성의 가부를 결정할 수는 없다. 또한 이 방법은 각 사람의 생각을 확인할 뿐 실제 사물의 객관성을 확인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생각을 통해 객관적 정보에 도달할 수는 없다.
객관적인 정보는 모든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보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실제로 옳은 정보이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에, 혹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물에 도달할 방법을 확보해야 객관적 사실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감각기를 통하지 않고 컵이나 모니터와 같은 사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으며 이 감각기는 우리에게 객관적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적 사물의 사실성을 보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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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는 감각기가 우리에게 사물에 대한 정보를 주는 방버을 알고 있다. 감각세포가 외부자극에 대해 반응하면 신경충격이 만들어진다. 이 신경충격들은 조합, 증폭, 감쇄 등의 과정을 거쳐 뇌에 도달한다. 뇌는 신경충격을 해석하여 감각기가 보내주는 정보를 확정한다. 만일 우리의 감각세포가 외부자극에 대해 올바로 반으하고 우리의 뇌가 신경충격을 올바르게 해석한다면 우리는 사물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얻게 된다.
한 종류의 감각기는 한 종류의 자극에 반응한다. 시각세포는 빛에 반응하고 청각세포는 기체의 진동에 반응하며 다른 감각기도 각기 한 종류의 자극에 반응한다. 또한 시각세포는 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청각세포는 빛에 반응하지 않으며 다른 감각기도 자신이 담당하지 않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밝은 빛을 눈으로 느낄 때 우리의 앞에 빛이 있으며 빛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신경세포는 또다른 자극에도 반응할 수 있다. 우리가 머리를 세게 부딪혔을 때 우리는 '번쩍'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 현상은 시지각세포가 물리적 충격에 반응하여 만들어낸 신경충격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물리적 충격을 볼 수 없으나 머리에 가해진 충돌은 우리가 본 밝은 빛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밝은 느낌의 원인이 눈에 가해진 충격인지 실제로 존재하는 빛인지 눈만으로는 알지 못한다. 단지 촉각을 통해 전해진 또다른 느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감각기의 착각은 신경세포를 통하지 않고도 일어날 수 있다. 각각의 감각세포는 자신이 만들어 낸 신경충격을 신경계를 통해 뇌로 보낸다. 이 신경계에 인공적인 신경충격을 직접 가한다면 우리는 감각기를 통하지 않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는 쥐나 비둘기의 뇌에 칩을 이식한 후 적절한 신경충격을 통해 그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기술이 좀 더 발전한다면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감각정보를 조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환상을 보기도 하며, 정신병에 걸려 잘못된 현상을 보기도 한다. 심리적인 원인으로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의 감각기는 그 구조의 한계 때문에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을 볼 때 감각기는 사물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항상 제공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감각기를 통해 사물의 원래 모습을 결코 볼 수 없다. 감각기는 그 자신의 구조에 따른 정보를 만들 뿐 사물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만들지 않는다. 하나의 시각세포는 빛에 반응하여 하나의 정보를 만든다. 우리의 눈은 수십만개의 시각세포로 되어 있다. 그 때문에 우리가 보는 사물의 모습은 시각세포의 개수 이상의 해상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 사물은 빛의 진폭에 해당하는 해상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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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의 감각기는 자극을 신경부호로 바꾸어 뇌로 보낼 뿐 감각적 자극의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신경부호의 자료에만 근거하여 사실적 대상의 정보를 구성한다. 가상적 대상의 정보도 사실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구성된다. 우리가 흔히 '가상의 사물'이라 부르는 3D영상을 살펴보자. 3D영상 속의 컵은 실제의 컵과 매우 유사한 시각적 정보를 우리의 눈에 준다. 우리의 눈은 컵과 유사한 신경부호를 뇌로 보내고 뇌는 컵에 대한 정보를 구성한다.
실제의 컵에 대한 신경부호를 바탕으로 우리는 컵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컵이 존재한다고 판단할 때 신경부호 이외에 다른 정보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컵 뿐 아니라 모니터, 사과, 책상 등의 존재도 신경부호를 통해 판단한다. 시각적 신경부호 뿐 아니라 촉각적, 미각적, 후각적, 청각적 신경부호에 대해서도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의 뇌는 3D영상을 통해 얻은 신경부호와 실제의 컵을 통해 얻은 신경부호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믄 각 신경부호가 담고 있는 내용의 차이를 통해 3D 영상의 컵과 실제의 컵을 구분한다. 최소한 3D 영상 속에 있는 컵의 표면이나 형태 등은 실제의 컵과 완전히 같지 않다. 또한 3D 영상 속에 있는 컵의 표면이나 형태 등은 실제의 컵과 완전히 같지 않다. 또한 3D 영상 속의 컵음 촉각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입체안경 등 3D 효과를 내기 위한 부소적 장비들도 가상적 사물과 사실적 사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현실적 제약은 극복될 수 있다. 수조개의 폴리곤으로 구성된 3D 컵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 폴리곤의 개수가 우리 눈의 해상력을 넘어서기에 우리의 눈은 이 컵과 실제의 컵을 구분할 수 없다. 또한 컵에 대한 시각정보를 우리의 시신경에 직접 입력한다면 3D 안경의 도움 없이도 완벽한 3D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자고 잇을 때 누군가 나의 감각기에 신경충격을 통해 입력되는 가상정보의 출력장치를 연결했다고 가정하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어엇. 내가 가상세계에 들어와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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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의 세계가 사실로 이루어져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세계는 사실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우리는 우리 옆의 커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등 여러 사물들도 마찬가지로 사실적 사물이다. 사실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상적 사물과 사실적 사물의 구분이 불가능할 때 파괴된다. 그러나 사실적 세계가 파괴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속의 사실적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개념을 부정하였을 때 여러 가지 방대한 문제가 추가적으로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적 세계가 파괴되어도 우리의 사실적 세계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실적 세계를 파괴하고 나면 새로운 사실적 세계를 찾거나 우리의 사실적 세계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하다 못해 실제로 느껴지는 사실을 부정할 때 생기는 당혹감을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굳이 그런설명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듯 하다. 우리는 완전한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수만년 이상 살아 왔으며, 수만년 이상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1 : '착각하는 이미지'라는 말의 의미가 상당히 애매하다. 이 애매함은 '가상'의 정의에서 비롯된다. 이 문장을 '존재하지 않으나 우리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대상'으로 고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상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가리키나 가상은 우리가 대상이 아닌 것을 대상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따라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대상'이라는 어구는 그 의미상 모순된다.
'착각하 는 이미지'라는 말은 그 자체도 문제이다. 이미지가 실제로 존재하며, 가상은 이 실제로 존재하는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상개념의 핵심은 '없는 것에 대한 착각'이며, 이 착각을 일으키는 근본 요소는 사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가상을 대상의 '속성'으로 이야기하지만 가상이라는 '속성'이 의지할 대상이 없기에 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는데 최대의 난점이 있다. 개념상으로는 이 '속성'조차 우리의 착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2 : *1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질문은 의미상 오류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들이 사실개념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러한 주석이 글의 흐름을 끊으므로 앞으로 대상이라는 표현의 오류는 지적하지 않는다.

*3 : 무의미 : 매우 부적절한 용어이다. 무의미란 '자신이 가리키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뜻한다. 그러나 실제 세계를 고려하지 않는 의미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주제이다.
실제 세계를 전제로 하는 현재의 언어체계 하에서 실제 세계를 고려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4 : 즉, 커피의 본질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본질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미묘하고 까다로운 특징을 지닌다. 가령 하이데거와 같은 사람은 고흐의 '구두'라는 작품을 해석할 때처럼 커피와 관련된 인간 경험의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멘 드 비랑, 메를로 퐁티와 같은 사람들 역시 '저항', '살'이라는 개념을 통해 커피의 본질에 대해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의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전재하고 있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해소하려고 한 그들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가상과 현실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최소한 3D로 만든 커피잔은 가상의 커피잔으로 생각된다.

*5 : 적록색맹인 사람은 빨간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주장이 객관적이나 이 사람은 컵이 빨갛다고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 컵은 빨간색이다.'라는 주장은 객관적 주장이 될 수 없다.
이 문제는 두 가지 괌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의 컵은 빨간색일 수도 있고 파란색인 수도 있고 노란색일 수도 있다. 만일 색채가 사물의 본래 모습 혹은 실재라면 색이 다른 컵은 같은 컵일 수 없다. 즉 색은 컵의 본질 혹은 사실이라 보기 여려우므로 색채를 객관적 대상에 포함시킬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색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이용해서 색상의 표기방식을 바꿀 수 있다. 색은 빛의 파장에 따라 달라진다. 이 점을 근거로 빨간색을 8000색, 녹색을 5000색이라 부를 수 있다. 색채의 명칭을 변경할 경우 색맹인 사람은 8000색과 5000색을 구분하지 못할 뿐 8000색과 5000색은 실제로 존재한다. 결국 이 두 반론은 모두 색채의 문제를 존재하는 사물(컵, 빛)의 문제로 전환하여 문제를 해결한다.